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 사태 (문단 편집) == 결말 == *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 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됐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상태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성은(군인)|김성은]]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장관]]이 장관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 한국의 경우 한동안 추가 파병보다 내부 단속에 들어갔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 [[구정 공세]]에 이어 원산에서 일어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해 가뜩이나 국내에 번지던 반전 여론이 더 거세지는 역풍을 맞았고 하필 그해 대통령 선거까지 걸려 난감해진 미국이 해결과정 중에 전투부대를 증파할 것을 한국 정부에게 요청했지만 북한에게서 1.21 사태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어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의 해결 때문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한미외교 역사상 최초의 [[통미봉남]]을 당해 뒤통수를 세게 두드려맞고 [[한미관계]]가 급경색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선갑도 부대, 장봉도 부대, [[684부대|실미도 부대]], 마니산 까치부대를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 북한의 경우 최종 작전까지는 못 했지만 한국과 미국을 깜짝 놀래키며 존재감을 인식시키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이어졌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후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들은 1.21 사태만큼 파급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패의 책임을 내부의 정적들에게 덮어씌워 제거함으로써 체제 유지에 이용했고 박정희 역시 한미관계의 급속한 냉각을 기회삼아 자기 권력을 다지는 차원에서 [[반공주의]]를 강력하게 강화하여 하술할 여파 문단의 내용처럼 대한민국을 사실상 병영화하는 수준의 강력한 통국민통제정책을 실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의 정치적인 입장에서 라이벌들보다 유리한 쪽으로 전개해 나감으로써 독재 체재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 있고 [[7.4 남북 공동 성명]]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 북베트남으로서도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미국과 최대 파병국이었던 한국의 공격으로부터 한숨을 돌렸다. 또 1.21 사태 며칠 뒤 베트남에서는 [[구정 공세]]로 인해 미국도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미국 언론이 일조했다. 내용상으로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괴멸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이긴 게 맞으나 북베트남이 미대사관을 습격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미 전역으로 방영되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더욱 들끓었다.] * 이 사건으로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길은 41년의 세월이 지난 2010년 2월 27일에야 민간에 개방되었다. 2020년 상반기 북악산 성곽로에서 [[북악스카이웨이]] 북측면을 추가로 개방했다. 현재 서울 [[북악산]]에 있는 '''김신조 루트'''가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어 북악하늘길의 제2산책로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사실 김신조는 당시 이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거기에 있었던 적도 없다고 이만갑에서 밝혔다. 김신조 루트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그저 자신이 살아남았으니까'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이용한 루트는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부암동(종로구)|부암동]] [[세검정]] 쪽이다.] 또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둘레길의 한 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완전 개방은 아니다. 이곳을 가려면 인터넷이나 전화[* 인터넷 이용이 어려운 어르신들에 한하여 전화 신청이 가능하며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신청을 받고 있다.]를 통해 탐방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약해 놓고 본인확인이 안 돼서 입장이 거절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하루 입장 가능 인원도 송추 방향에서 5백 명, 우이동에서 5백 명으로 하루 1천 명의 인원 제한을 두고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고 오후 4시까지 하산하여야 한다. [[노쇼|예약을 했는데 입장하지 않을]] 경우 추후 예약이 제한될 수 있다. 현재도 이 코스는 군부대 훈련장이 있고,행군코스로 사용되고 있어 군부대 훈련 일정이 있는 날엔 예약이 불가능할 수 있다. 평상시에도 우이령길을 이용하면 몇몇 군인들이 이동하거나 훈련장 시설물 등을 정비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https://reservation.knps.or.kr/trail/searchTrailReservation.do|관련 사이트. 이곳에서 예약도 가능하다.]] * 자하문 초소 전투에서 전사한 [[최규식]] 총경은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창의문]] 남쪽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있다. 그런데 정작 최규식 경무관이 순직한 곳은 그 곳이 아니다. 또 총격이 벌어졌던 주변 지역에는 '총알소나무'라는 당시 총격전 사이에서 15개의 탄흔이 남아 그 당시 흔적을 남긴 나무가 남아 있으며 [[1박 2일]]에서 [[1박 2일/2010년#s-17|소개되기도 하였다]].[* 당일치기 서울특집에 이수근의 북악산 성곽길 미션에서 나온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 그 탄흔에 손가락을 넣자 [[수지]]로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 부상 경찰관 중 정종수 경사는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창의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왼편에 순직비가 있다. 당시 소속이었던 [[서울종로경찰서]] 현관에는 흉상이 건립되었다. * 처음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쪽이 육군 방첩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신조]]에 대한 공작을 철저히 해서 그가 북한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자회견을 하도록 교육 및 연출하여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급하게 기자회견에 내보내는 바람에 위에 나온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전 국민이 기절초풍했다. 사건 직후 육군 방첩대장 [[윤필용]] 준장은 [[제20기계화보병사단|20사단장]]으로 좌천되었고 후임 육군 방첩대장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육군 방첩대의 위세가 꺾이고 [[중앙정보부]]가 득세하게 되었다. 육군 방첩대는 몇 달 후 [[육군보안사령부]]로 전면 개편되었다. * 이 사건을 진압한 부대 중 하나가 당시 서울지역 향토예비보병사단이었던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이 일로 제1땅굴을 발견한 [[제25보병사단]]과 함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동원된 장갑차의 사격으로 동료들이 사살당하면서 공비들이 패닉에 빠져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고.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대대[* 후일 현 수방사 [[제1경비단]]의 두 전신 중 하나인 제30경비단으로 승격되었다.]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무수한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공비들의 모습과 위치를 환히 비춰 준 것도 진압에 도움이 되었다. * [[1972년|4년 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본심은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청와대 습격은 우리 공화국 내부의 [[김창봉(북한)|김창봉]], [[허봉학]] 같은 극렬 분자들이 임의로 일으킨 사건이오.[* 사실 북한은 꼬리를 떼야겠다 싶으면(...) 극렬 분자 운운한다.] 우리가 박정희를 죽인다고 남조선이 없어지겠소? 나를 죽인다고 우리 공화국이 없어지겠소?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란 말이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뒤 관련자들을 모두 철직(해임)시켰소. 남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박정희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었다고 꼭 전해주시오."''' 라고 말했다. * 당시 이 사건을 계획한 북측 인물로는 [[김창봉(북한)|김창봉]], [[허봉학]], [[김정태(1928)|김정태]]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남사업으로 업적을 쌓아 김일성에게 신임을 얻은 뒤 김일성의 동생이자 권력 서열 [[2인자]]인 당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북한)|김영주]]를 끌어내리고 군과 당권을 장악하여 김일성의 뒤를 이으려는 욕심으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내막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 이후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군부의 힘이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북한이 청와대의 세부 구조를 알았던 것은 남한 내의 간첩의 도움이었다고 술회했다. 정확하게는 청와대 근무 직원의 부인이 간첩이었는데 그녀가 [[음부]]에 청와대 배치도를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심문 도중 어디선가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수색해 보니 종이가 음부에 들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것을 자신이 손수 적발하긴 했는데 윗선들이 뭐라고 해서 풀어주었고 그래서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 구조를 알 수 있었다는 건데... 이 사람의 회고록의 신빙성은 말이 많으므로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자. * 당시 침투조가 사용했던 장비들([[PPS-43]] 기관단총, [[TT 권총|TT-33]] 권총, [[F1 수류탄|F-1]] 세열수류탄, [[RPG-43]] 대전차수류탄, 절단기, 단검 등)은 용산 [[전쟁기념관]]과 경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인왕산에 숨었을 때 이들은 [[등산]]이라는 걸 몰랐는지, 등산객들이 올라와 "야호!" 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우리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판단하면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김신조는 이때부터 탈출각을 세웠다고 한다. * 사살된 무장공비들의 유해는 반환되지 않고 파주 [[적군묘지]]에 묻혀 있다.[* 북한이 이들의 유해 인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중 8명은 [[무명용사]]로 남아있다. 김신조가 시체를 확인하고 신원을 증언하긴 했으나, [[헤드샷|머리가 으스러지거나]] [[M2 화염방사기]]에 [[분사(죽음)|구워진]] 꼴을 당한 경우 알아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나마 식별이 쉬웠던 시신이 총조장 김종웅 상위로, 부대원들 중 가장 키가 컸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